디모데전서 6 : 11 ~ 21

오늘 읽은 말씀에서 느끼게 되는 것은 목회 서신으로서 교회 행정에 관한 이야기보다 하나님의 사람이 어떠한 인격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데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선 순위는 언제나 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의 사람됨에 있습니다.

가령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어떤 책인가를 말하면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교훈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책망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바르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로 교육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절인 17절 말씀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먼저 강조했습니까? “온전”이란 말이 17절에 두번 반복되는데 그 우선 순위에 있어서 일보다는 사람을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특성은 우리의 사람됨만큼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행위의 문제를 강조하기에 앞서 그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1절이 어떤 표현으로 시작됩니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조금 전에 말씀드린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 성경이 어떤 책인가 하는데 대해서 말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한 최고의 이상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말에 선행하는 구절을 다시 한번 주목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교리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직면할 수 있는 유혹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진다고 하면서 9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여기서 ‘떨어진다’는 말이나 ‘빠진다’는 동사는 어떤 그릇된 대상에 의해서 완전히 포로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9절과 10절 말씀을 통해서 정욕과 돈에 포로가 된 사람들의 삶에 대해 경고한 후에 11절 말씀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인 너는 정욕과 돈의 포로가 되기 쉬운 이 유혹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께만 포로가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과 정욕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게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마지막 메시지의 중간 부분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5절을 보십시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고 순종하기를 원하는 그 하나님이 역사 속에 다시 한번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고 나타내시는 그날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습니까? 15절 중반에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 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불멸의 하나님, 인간의 도덕적인 경건이 흉내 낼 수 없는 절대적인 거룩함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이 하나님에게 피조물인 우리가 포로가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님의 사람,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소망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구약에도 ‘너 하나님의 사람아’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가령 신명기 33장 1절에 보세요. 이 말씀은 모세가 죽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살았던 모세.

그가 숨을 거두려 할 때 성령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과연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내리실 수 있을까요?

사무엘상 9장 6절을 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탄생할 무렵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 나라의 첫 번째 왕을 찾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의 인도함을 통해서 왕이 되는 과정을 밟아 나아가게 됩니다. 정말 그 길을 인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를 실감케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올바른 대답이 주어질 것이고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제가 자란 시골 동네에는 그 당시에는 비교적 큰 교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옛날 연희 전문을 졸업하신 분이셨고 학생시절 연희 전문의 축구 선수였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동네 청년들 축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면대항, 군대항 축구 시합을 할 때 이 목사님만 팀에 계시면 마음이 푹 놓이고, ‘보라 우리가 이긴다’는 자신감이 들곤 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린 때를 생각하면 우리 목사님 생각이 나고 목사님만 계시면 어렵던 문제가 다 해결되고 걱정되던 것도 다 풀려 나가던 그때의 마음 든든함이 있곤 합니다.

역사가 어두어질때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등불이 어두워 질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열왕기상 17장 24절을 보세요.

엘리야라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인데, 엘리야가 머물고 있는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아들이 죽었을 때 이 절망적인 상황을 엘리야에게 호소합니다. 이때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그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엘리야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엘리야를 통해서 나타난 기도의 능력과 그의 경건함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 여인이 마지막에 그 앞에 엎드려 고백한 말이 24절입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아노라 하니라”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우리가 우리를 잘 알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존경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약점과 내 허물을 다 아는 가까운 이웃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사는 그리고 나를 자라는 사람이 나의 약점을 알면서도 내 삶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을 바라보면서 나를 향해서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으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느헤미야 12장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레위 사람의 어른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라 저희가 그 형제의 맞은 편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한대로 반차를 따라 주를 찬양하고 감사하며”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역사의 장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예루살렘성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주었던 메시지를 기억합니다. 이들이 다윗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대로” 하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랩니다. 그러나 다윗의 영향력은 아직도 그 백성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먼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신앙의 가자 아름다운 귀감이었던 다윗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잘 정말 부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가 없는 당에서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고민하며 결단을 내릴 때 우리를 회상하면서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는 하나님의 사람이셨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성공적인 삶이었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얼마나 우리 삶에 도전을 주는 이상입니까?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돈과 권력과 정욕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었던 디모데가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갈 때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면서 마지막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1. “피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경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돈에 대한 유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부에 대한 탐닉을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필요없는 변론을 피하라는 말입니다. 거짓된 이단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변론을 위한 변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론을 위한 변론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삶을 위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는 것도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비춰 보고 고민하는 그런 성경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어떤 인격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는 그리고 그 말씀 앞에 가슴이 깨어지는 고백과 눈물의 회개가 있는 그런 성경 공부라면 우리는 바르게 말씀을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부터 돌리고 하나님이 기대하는 삶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변론을 피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유혹의 장소를 피해야 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유혹을 받았을 때 그곳에서 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 나를 죄에 빠지게 하는 상황이라는 판단이 서게 되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내가 그 자리에 서야 한다면 물러서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주님 앞에 영광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삶이 그르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피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일꾼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무 그릇이나 쓰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을 쓰시기 때문입니다.

2. “좇으라”고 했습니다.

11절에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인격의 덕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나와 하나님 사이의 바른 관계를 이루는데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받는 가장 놀라운 축복 가운데 하나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강조된 것이 경건입니다. 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인격적인 덕목이라면, 경건은 그 하나님을 향해 가는 삶의 자세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격의 특성입니다. 의와 경건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입니다. 의가 없이 경건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사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사랑은 하나님을 향하는 관계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야 할 덕목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실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 갖추고 있는 덕목인 믿음과 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갖추고 있는 덕목인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인내와 온유입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건이나 상황들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인답게 인내하고 있습니까? 인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온유’라는 덕목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이 온유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인내와 온유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의와 경건을, 자신과 이웃의 관계에서는 믿음과 사랑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서는 인내와 온유를 좇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임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성숙해 가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억울한 상황에 부딪혀 손해를 보았을 경우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손해를 본 사실보다는 그 상황에서 나의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 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이웃을 용납하고 용서하므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손해본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싸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싸움을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좋아했던 말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인데 그 마지막 장인 4장에 바울이 한 고백이 6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싸운다’는 말은 사단에 대해서 혹은 죄와 더불어 싸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특별히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싸운다”는 말을 좀더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기꺼이 향할 때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의미의 싸움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을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무슨 말입니까?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서 땀 흘리고 몸부림치는 이 세대에서 그대들은 선한 싸움을 싸우시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당신들이 싸워야 할 선한 싸움입니다.”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요함을 추구하는 것은 승리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의 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주님 앞에 서게 될 터인데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며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이 싸움을 싸웁니다.

돈의 쓰임새는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물질을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이것을 사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실까?” 생각하면서 쓰십니까?

4. “취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영생을 취하라” 했습니다.

여기 ‘취하라’는 말은 굉장히 강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냥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튼튼히 붙잡고 누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누가 영생을 즐길 수 있습니까?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까? 영생을 얻은 사람은 많지만 영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이고 그것을 감격으로 받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구주로 믿으십니까? 영생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생을 누리매 즐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절에 뭐랬어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12절의 ‘취하라’는 말이 다시 한번 나옵니다. 18절에 나오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영생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내 소망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저 나라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내 놓을 수 있는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하면서 그 마음에 주님께서 주시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영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생을 취하라 영생을 즐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5. “지키라”고 했습니다.

1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했습니다.

여기 자세히 보세요.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인격을 설명할 때 쓴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한다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기 위하여 얼마나 애씁니까? 이 명령을 지킵니까?

왜 우리가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까?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입니다.

언제까지요?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요. 15절에 보면 ‘나타난다’는 말이 한번 더 나옵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여기서 ‘나타난다’하는 말은 본래 새벽에 빛이 밝아 오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새벽의 여명이 밝아올 때 우리 주님 다시 오시고 새로운 역사의 여명이 밝아올 때, 하나님의 나라의 동이 틀 때, 주님의 영광스러운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까지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순간 내가 가장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돈이라면 나는 돈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권력이라면 나는 권력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정욕이라면 나는 정욕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자존심이라면 자는 자신의 사람입니다. 자존심의 노예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차피 포로가 되어 산다면 하나님의 포로가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포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에 사로 잡힌바 된 포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쥐고 갈 수 없는 돈을 위해 그것의 노예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업을 위해 돈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내 삶을 보았을 때 과연 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시간은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 시간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일생을 결산하는 그날 하나님의 사람으로 저의 생애를 결산하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삼아 주세요. 이런 결단, 이런 기도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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